+찬미 예수님
예수님의 부활을 봉사자들과 함께 기뻐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이번 부활은 저에게 예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오네요. 임시성전에서 부활을 보내게 되어서 올해는 매년 부활절마다 청년들이 하던 잔치준비를 하지 않았거든요.그 덕분에 부활성야미사를 처음부터 드릴 수 있었습니다. 빛의 예식부터 예식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며 말씀전례, 세례서약 갱신, 성찬전례까지 거의 첨으로 전례속으로 푹 들어가본 것 같아요. 지금쯤이면 한참 즐겁게 부활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인데, 오늘은 조촐하게 모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부활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봉사자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조금 끄적여 봅니다.
또한 이번 성삼일도 기억에 남는데요, 사실 부끄럽지만 고해성사를 자주 안보다 보니까 이번에도 판공날짜도 못맞추고 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우째우째해서 의령에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고 주님만찬대축일 미사전에 본당 어른분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처음으로 홍어삼합을 먹어봤음^^) 만찬 미사를 하면서 의령에서 미사를 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던 만찬, 그리고 만찬을 통해 알려주시려던 사랑의 나눔이 신자들에게로 부터 느껴져서, 미사 전례를 하면서 정말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은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 금요일에는 이진수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 이게 바로 렉시오 디비나구나 라는 생각이 강론내 들었거든요. 봉사자들도 앞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하게 되니까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신부님의 강론중 떠오르는 것만 조금 나누어 볼께요. 수난복음 앞부분만 따와봤습니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물으셨다. + “누구를 찾느냐?” ○ 5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였다. ⊙ “나자렛 사람 예수요.”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다.” ○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 “누구를 찾느냐?” ○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였다. ⊙ “나자렛 사람 예수요.” ○ 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 9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0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 12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13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14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16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17 그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물었다. ●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 “나는 아니오.” ○ 18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19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21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이날 신부님 께서는 강론 첫머리에 성금요일 성당에 모인 신자 전체를 텅빈무덤 과 무덤에 와있던 이들에 비유하시며, 거룩한 것을 찾으러 많은 이들이 성당을 찾지만 오늘 우리가 맞닥드리는 것은 텅 빈 무덤, 공허라고 말씀하셨습니다.(기선제압) 그러면서 오늘 수난복음에 많은 이들이 등장하고 많은 일 들이 일어나지만 베드로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하셨습니다.(사실 다른 인물들도 거의 다 살펴봄) 베드로는 예수님의 일생동안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있고 복음서에도 다른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지는 않아도 꼭 베드로의 이름은 들어간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장 힘들때 그는 예수님 곁을 지키지 못한다. 이것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수는 없지만 복음서에는 대사제와 친분이 없었기 때문에라고 되어있다.
또한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다라는 구절이 두 번나오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첫째 제자로서 빛이신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분이 빛이심을 보고 알았다. 하지만 이 밤 예수님과 떨어졌을 때, 즉 빛이신 예수님에게서 떨어졌을 때 그는 추위를 느낀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위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과 떨어짐으로 인해 느끼는 추위인 것이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의 이야기로 옮겨갔는데, 이 연결고리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ㅜ ㅠ) 그 후 예수님의 생애를 공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시고 또 내려오셔서 낮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자리가 없으신 분이셨다. (제 표현의 한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그 내려오신분의 첫 탄생을 성서는 '그 여관에는 자리가 없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는 이들(세리,창녀,병자들 등등)과 함께 하셨고, '백성을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라며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예수님의 그 한 자리를 빼앗기위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하시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조가 무엇인가?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혼돈'의 상태에서 존재를 말씀으로 만들어주는것. 그런데 존재 자체이신 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또 세상에서는 자리가 없으셨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변모하셨을때 곧 빛이신 예수님을 체험했을때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초막을 지어 여기서 살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어떤 자리에 머무는 것은 예수님의 삶이 아니었다. 심지어 돌아가시면서도 예수님은 자리가 없으셨다.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공중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빈무덤도 또한.. 성서에 '하늘의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조차 없다'는 말씀은 이를 얘기하는 것이다.(여기서 돌트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하여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자리를 얻기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를 보자. 그 아래에 누가 있는가? 어머니이다. 그 감당안되는 자리에 어머니가 계셨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때 그 감당안되는 상황을 받아들인 분이 돌아가신 십자가 아래에 또한 계신다. 예수님보다 더 아래에 있다는 것, 이것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나 십자가 아래의 103위 순교성인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십자가 밑의 자리는 대부분 순교자들이나 주보성인들에게 돌아간다.
강론의 마지막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강론을 들으면서 나는 언제나 이렇게 묵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말씀이 정말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선 금요일 들은 강론을 바탕으로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자리는 어디일까? 그 자리는 어디일까라는 생각을 계속하다보니 제 마음속이라는 답이 마음 한 곳에서 올라옴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자주 듣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 상투적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 밤 제가 느낀 마음의 소리는 분명 저에게 당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주보에서 본 주교님 강론 말씀 중 와닿는 부분이 있어 올립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슬퍼합니다. 상처입고 아픔 중에 살아갑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폭력에 시달립니다. 다름과 차이 때문에 핍박받고 있습니다. 자비와 순수한 마음을 원하고, 평화를 이루는 일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위로를 받고 싶고, 배가 고프고 목마른 채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고, 끝내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증해 주시는 참된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며 살고 싶습니다. 세상의 권력에 의한 능력이 아니라, 무력함과 연약함을 통한 능력으로 건너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작은 줄에 매달려 흔들리며 꼭두각시로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권력이 아니라, 무력함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능력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에 투신하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능력에 의지하며 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기대어 서고 싶습니다. "
이런 마음속의 바램들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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