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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비또
(등록일 : 2006-04-24 23:34:01 |
IP : 59.22.211.185 |
Hit : 5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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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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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성당에서 성유축성미사를 했었는데
마산교구 신부님들께서는 다 오신거 같더라구요..저는 학교수업때문에
못갔었는데..어머니께서 주교님 강론이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하시더라구요..
우리함께 나눠요...
미사 강론
사제는 늘 <사제는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과 씨름하면서 살아갑니다.
저는 오늘 교구의 사제단과 교우 여러분들과 성유축성 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사제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사목자의 모습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고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 외면과 배척으로 상처입어셨고 , 로마 군사들의 조롱과
비아냥, 매질과 채찍질로 상처입어셨으며, 가시관으로, 넘어지시면서, 창에 찔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상처입어셨습니다. 이 상처들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이사야서는 상처 입은 치유자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고,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러나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예수께서는 상처 입은 분으로서 우리 인간을 위한 생명의 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사제를 위한 중요한 표상을 만납니다. 만일 사제의 신원이
에수 그리스도의 신원에 닿아있다고 한다면, 사제 역시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예수님처럼 상처 입은 사제 역시 백성을 위한 생명의 샘이 될 것입니다. 자기
상처에 맞서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사제의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길은 사제의 지식이나 재능, 사목적 기술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제의 상처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사제는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진지하게 상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제가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한계와 대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내가 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 약점과 결점, 원한과
괴로움 등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제가 솔직하게 자신의 상처를 충분히 바라본 다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 너그럽게 됩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지 않고 진심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의 상처와 맞서면 또한 두려움 없이 다른 사람의 상처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처를 덮어버릴 필요가 없고, 상처를 견디어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아픔도 인정하고 동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제는 자신의 상처를 성급하게 치유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자신의 상처와 화해해야 합니다. 상처는 녹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화해해야만 생기를 찾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치 밤새 씨름한 끝에 하느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셔서 야곱이 평생 절름거리며 살았듯이(창세 32, 23-33) 상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작용하신 기억으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눈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상처 입은 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만일 야곱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고, 상처입지 않았다면 형 에사오 라는 그림자를 마주 보며 걸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 속에서 인간 존재의 마지막 신비와 대결합니다.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상처를 입히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상처 입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장 깊은 곳이 뿌리 채 흔들리지 않고서는 그리고 상처입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제들에게 주시는 상처 보다 더 큰 상처를 아무도 사제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가장 깊은 상처는 하느님께서 사제들에게 주시는 상처입니다.
이러한 상처는 본질적으로 사제의 존재의 일부이며 하느님께서 친히 생겨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제의 상처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드러내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따라서 많은 상처를 입고 사는 사제는 그 만큼 하느님을 뜨겁게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심오하게 사목직을 수행하는 사목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이 약해도 괜찮으며, 자신의 약점들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목자의 상처는 하느님께서 입히신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약점이나 결점이 있어도 괜찮다는 분위기가 사목의 현장에서 감돌 때 비로소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약점을 시인하면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주어지고, 새로운 관점을 여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사목자는 있는 모습 그대로 있어도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사목자가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며, 업적이나 성과를 올리는 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며, 단지 존재하기만 해도 충분하다면 그것은 항상 사목자에게 선물로 다가옵니다. 사목자가 백성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사목자의 상처를 통해서 백성을 치유해 주십니다.
서로에게 숨기지 아니하는 상처를 통해 진정한 만남이 일어나고, 만남 속에서 하느님 친히 치유하십니다.
단순히 인생의 경험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사목자가 좋은 치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는 길은 그를 사제의 상처 속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제의 상처 속에서 사제와 함께 자신도 상처를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사제 역시 상처받아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우리보다 더 깊은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치유해주어야 합니다. 이 치유는 사제가 하느님을 기억나게 해주는 기억 매체로 살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사제는 자신의 활동이나, 능력이나 자질 또는 재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제로서 존재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느님을 기억나게 해주는 매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하느님을 기억나게 해주면, 치유가 일어날 것입니다.
한 상처 입은 인간이 상처 입은 예수를 만나면 천직이 바뀌고, 소명이 바뀌고, 위상이 바뀌게 됩니다.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자캐오가 그러했고, 사도 베드로가 그러했으며, 사도 바오로, 사람리아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특히 오늘과 같은 사제의 날에 스스로 묻습니다. 상처 입은 내가 치유되어 변화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상처 입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치유가 될 수 있을 만큼 도대체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었던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단 여러분 저를 포함한 우리 역시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우리의 상처만으로도 우리는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사제 자신의 상처보다 먼저 치유해야 하는 운명을 선택했습니다.
사제가 선택한 이 운명은 사제의 생명을 갉아 먹도록 내어주는 것이며, 생명은 생명에 기대어서 있다는 헌신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명을 너에게로 운반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사제 자신을 위한 생명은 없습니다. 사제가 애써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지 않더라도, 사제가 애써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 안정장치를 마련하지 않더라도, 너를 위해 나의 생명을 내어 놓기만 하면, 그 결과 생명이 사제를 찾아올 것입니다.
거룩한 성삼일이 시작되는 첫 날에 사제 서로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 힘을 모아 상처를 치유해주는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 즉 예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하도록 다짐 합니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가 사목자일 것입니다. 영롱한 진주 역시 그 첫출발은 상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를 쓰러트리고 상처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크게 쓰시려고 우리의 뼈를 고단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상처가 없다면 몸은 자라고 영혼은 자라지 않는 식물인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상처는 없습니다. 모든 상처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대축일을 미리 경축하면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망을 키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리시는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죽음의 처지에서 생명의 처지에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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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2건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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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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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인든 모두가 사목자일 것입니다....................아멘.!!200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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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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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게시판으로 옮겨도 좋을 거 같네요200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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