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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지도신부  (등록일 : 2007-03-26 09:46:21 | IP : 121.146.90.88 | Hit : 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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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 칼럼
함께하는 성서 공부

hora in creatio (창조안에 시간)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 - 부산 가톨릭대학교 교수

세인의 관심을 끌고자 "안간힘"을 다 쓰는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강해>는 그것의 많은 긍정적인 부분들과 기존 기독교 전통에 대한 좋은 의도에서 비롯한 정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을 너무 일방적으로 축소시켜서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카테고리를 너무도 같은 차원에서 보고 있기에, 요한 복음이 마치 그 당시의 세계를 주도하던 二分法的인 고대 희랍 사고의 전통을 넘어서지 못하고,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비현실적인(감각의 대상인 시공의 세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신화적인("시간 밖의") 세계관에 사로잡혀있다고 전제하고서는 요한 복음은 창세기의 주석 격인 서두 첫 두 절 부분에서의 구원론적(1a 그리고 2절) 차원과 존재론적(1b) 차원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해결치 않은 채 그대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도올에 의하면 이는 우주의 투쟁의 긴장 속에 내재하던(immanent) 로고스와 우주 밖의 그러니까 시공을 벗어난 초월적인(transcendent) 로고스로 대표되는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관과 파르메니데스적 세계관(플라톤과 플로티노스로 이어지는 전통 그리고 Gnosticism 역시 이분법적이라는 면에서는 그 맥락을 같이 한다)이 연결된 것으로서 이것들의 분열과 융합이 요한복음의 끊임없는 주제를 형성한다(김용옥, 요한복음강해, 통나무 2007, 92.100 참조).
하지만 그는 그렇게 모순적인 연결로 보이는 현상(표현) 이면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그의 요한복음주해를 전개해나간다. 하지만 그가 놓친 사실은 요한복음은 우선적으로 히브리 성서의 첫 번째 책에 대한 주해이며, 이는 요한 복음 서두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요한 복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창세기의 빛에 비추어서야(illuminatus) 제대로 읽힐 수 있는 책이다.
히브리 성서의 제일 첫 부분부터 도올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데, 하느님은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들을 좋은 것으로 여기셨으나 거룩하게 하지는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일곱째 날뿐이다. 안식일에 대한 유다 전통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인간이 궁극적으로 二分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이 아니라 성과 속이다. 그것은 인간이 공간(적인 것)과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가르친다.
기술 문명 속에서 우리는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며 그 공간의 세계에서 우리의 힘을 증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공간의 세계에서 획득하는 힘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별안간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공간의 거리를 극복할 수는 있어도 과거를 되찾거나 미래를 파헤칠 수는 없다. 사람은 공간을 넘어서지만, 시간은 사람을 넘어선다. 우리는 실로 시간 속을 통과하고 있지만 정작 시간의 실재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시간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시간은 우리의 모든 경험에 본질적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모든 경험을 넘어선다. 시간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해 있다. 시간은 모든 범주 위를 떠도는 신비이자 他者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존재의 우정과 일치는 시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우리는 저마다 공간의 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저마다 자기 만의 공간이 있지만, 시간을 점유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순간을 독차지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속해 있음과 동시에 모든 살아 있는 사람에게 속해 있다. 시간은 공유의 대상이고, 공간은 소유의 대상이다. 공간을 소유하면 다른 모든 존재의 적수가 되지만, 시간 속에서 살면 다른 모든 존재와 동시대인이 된다.
인류는 여러 민족과 여러 나라로 갈라지고 나뉘어져 있다. 공간 속의 사물이 빼앗아 간 것, 바벨탑이 빼앗아 간 것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바로 시간 속의 순간이다. 이 시간 속의 순간이야말로 메시아의 마지막 때다. 모든 사람의 일치를 회복하고 각자의 인격 그리고 역사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은 그때에 성취된다. 공간과 그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물은 하지만 일차적으로 분리를 지향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것을 통해 그것의 하느님으로부터의 현저한 차이가 드러난다. 사물은 분리된 존재로서 전체로부터 분리된 개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은 찰나가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은 전부 아니면 無이다. 탈출 3,2에서의 모세가 본 불 붙지만 영원히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와 같은 것이 시간이다. 각각의 찰나는 다른 찰나에게 길을 내주고 사라져야 하지만, 시간 자체는 타서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은 독자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것은 공간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우리가 모든 존재의 일치를 느낄 수 있는 것도 그래서 시간 속에서이다. 반면 공간은 하느님과 공통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산꼭대기에는 자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고요한 바다 속에는 영광이 충분치 못하다. 그래서 공간을 비롯한 사물에는 하느님과 닮은 것을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거듭해서 이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생긴 것이 십계명 제1 조항이다(성상금지!).
시간이 없는 세계는 하느님 없는 세계, 갱신도 없고 창조주도 없는 세계, 자체적으로 자존하는 세계가 되고 말 것이다. 시간이 없는 세계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세계, 사물 그 자체,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가 되고 말 것이다. 시간 속에 있는 세계는 하느님을 통해 지속되는 세계(creatio continua), 무한한 계획이 구체화되는 세계다(Vorsehung). 그것은 사물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 안에서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에게 이 시간을 선사해주신 분의 현존을 감지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영원이 시간의 근원이며, 시간 속의 영원이 존재의 비밀임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시간의 문제는 시간을 성화함으로써만 풀 수 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변장한 영원이다. 성서는 그래서 공간보다는 시간에 더 관심을 갖는다. 성서는 세계를 시간의 차원에서 본다. 성서는 나라들과 사물들보다는 세대들과 사건들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지리보다는 역사에 더 관심을 보인다. 예언자들, 커투빔(히브리 성서 내에서 모세오경과 예언서들 위의 모든 책들) 그리고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들과 묵시문학에 있어서도 시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렇듯 유다-그리스도교적 성서 전통 안에서 시간은 공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다. 기술 문명이 우리의 공간 정복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은 종종 시간을 희생하여 이룩된 것인데 반해서, 유다 전통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얻어 만나고 그분과 닮은 것을 발견하는 길은 공간 속에서가 아니라 항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공간과 그 속의 사물에 우리의 정신이 사로잡힌다면 우리의 모든 활동이 그 영향을 받게 되어, 심지어 종교까지도 신이 특정 공간 속에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결과 그런 장소들이 성소로 선정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누가 신에 가까이 있는가가 문제가 되며, 이는 필연적으로 분쟁과 폭력을 가져다 준다(이스라엘 내에서는 Jerusalem-Kultzentralismus 대외적으로는 Monolatrie를 출발점으로 한 Monotheismus). 하지만 하느님은 공간(의 사물) 속에 계신 것이 아니라 시간의 찰나 속에 계시며 바로 그것이 영원에로 통하는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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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2건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가블 | 주보에도 이 글보다 간단하게 실린것을 어제봤습니다. 짧아서 잘 모르겠던데 이 글을 보니까 조금 이해가 되네요.. 성서를 보는 큰 틀을 알려주신거 같네요..이렇게 아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때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2007-03-26 | x
쫑디오니시아 | 흡...전그래도 아직 잘모르겟다는...
뽑아서 다시 천천히 읽어봐야겟어요..ㅜㅜ200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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